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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의 세계-정치, 종교,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마음관통 성경통독 #01]

신약시대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은 헬레니즘(헬라의 언어와 문화)이라는 바탕 위에 로마를 통한 정치적 통일이 국제화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었다. 이런 국제화의 조류는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지역이 로마를 중심으로 생활하도록 강요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신적 주체성이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로마에 의해 강요된 변화가 삶의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1. 정치

① 로마
BC 753년경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의 정치적 변혁기를 지나 황제중심의 제정 체제로 정착되면서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로마 제국은 속주라고 불리는 영토로 나누어졌는데, 속주의 통치자는 황제가 임명하느냐, 원로원이 임명하느냐에 따라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로 구분되었다. 군대가 주둔해 있는 접경 지역과 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속주는 황제가 총독을 임명해 다스리게 하는 한편, 로마에서 멀지 않은 속주에는 원로원이 총독을 선출하여 파견했다. 몇몇 지역은 황제의 허락을 받은 왕들이 지배하기도 했다.

로마 당국의 식민지 정책은 유화적이어서 지방 자치정부가 그 지역의 특성을 보존하면서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지방 자치정부에 주어진 권한은 국토 개발, 경범죄 처벌, 재산양도 등 경미한 것들이었고, 외교 관계, 사형 집행권, 세금의 징수 등은 로마 당국에서 파견한 관리에 의해서만 시행하도록 했다.
신약성경 시대의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디베료),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네로를 거쳐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까지 이른다. 성경에는 세 명의 황제가 언급된다.

② 팔레스타인
BC 63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는 이두매 사람(에돔 족속)인 안티파테르에게 정치 권력을 주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헤롯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게 했다. 그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 따라 팔레스타인 안에서 헬라 로마 문화증진에 주력했다.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세바스테(헬라어로 ‘아우구스투스의 도시’라는 뜻)라 명명했고, 지중해변에 항구도시를 개발하고 가이사랴(‘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로 명명했다.

그는 이방인으로 유대인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첫 아내 도리스를 버리고 하스몬 가문의 여인 마리암네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한 BC 19년에는 유대인이 기뻐할 성전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그는 잔혹하여 자기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가족마저도 예외 없이 처단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는 잔인함도 보였다(마 2:16-18).

헤롯 대왕이 죽은 후 로마는 그의 세 아들을 분봉왕으로 삼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헤롯 아켈라오(아켈라우스)에게는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 지역을, 헤롯 빌립(필립포스)에게는 갈릴리 동쪽과 북쪽 지역이 분배되었다. 아켈라오의 통치 기간은 길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억압적으로 통치하여 결국 유대인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고소했고 AD 6년에 폐위되어 추방되었다. 그의 자리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이 맡기 시작했다. 빌라도가 바로 다섯 번째 총독이었다.

그 후 헤롯 아그립바 1세 때 잠정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AD 44년 그가 죽은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분봉왕 없이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AD 27년 출생)는 AD 48년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와 함께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을 받아 다스리다가 AD 100년에 죽었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개관 중 ‘신약시대 통치자들’, ‘헤롯 왕조 가계도’를 참조).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사법기관으로 산헤드린이 있었다(성경에는 ‘공회’로 번역됨). 신약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기구로서 대제사장을 수장으로 하며 70명의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이 산헤드린의 주요 기능은 백성들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에 관해 재판하는 것이었다. 판결을 통해 형을 선고할 수 있었으나 사형은 로마에 속한 권한이었다.

2. 종교

① 로마
로마 당국은 국가의 부흥과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반 대중들은 개인적 수호신을 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소아시아, 바사 등 동방으로부터 신비종교들이 들어왔고 점성술과 마술도 민간에 널리 퍼졌다. 로마 제국의 종교적 특성중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황제 숭배이다. 원래 이 사상은 영웅과 신을 동일시하는 동방세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렉산더 대왕 때 서방 세계에 도입되어 로마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지만 황제 숭배는 모든 제국민들에게 요구되었다.

②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배타주의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내의 공인된 종교가 되었다. 당시 유대교 안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분파가 있었다.

◯ 사두개파
이들은 부유한 귀족 지배 계층으로 주로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산헤드린의 많은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BC 2세기 하스몬 왕조 때부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권력의 편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모세 오경만 인정했다. 성전 예배를 율법의 중심으로 보았다. 내세와 부활, 영적 세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고 지극히 현세적이었다. 이 명칭은 다윗, 솔로몬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으나 분명치는 않다.

◯ 바리새파
‘바리새’라는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나온 말로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려는 태도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헬라의 셀류코스 왕조가 율법을 금지하고 헬라화를 강요하며 핍박할 때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저항한 ‘하시딤’(충성스런 사람들)이라는 무리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바리새파가 나온 것으로 본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했으며 모세오경 이외에 구전되는 가르침(마 15:2)도 중요하게 여겼다. 영혼 불멸과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었다. 이들 중에는 대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들도 많았으며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다.

◯ 에세네파
이 명칭은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아람어 ‘하사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들은 도시를 떠나 공동체생활을 하며 정결한 삶을 추구했다. 엄격하게 규정된 일과에 따라 함께 일하면서 성경 해석을 포함한 종교적 문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평소 흰옷을 입었으며 정결 의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준수했다. 독신으로 살면서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노예를 두지 않았다.

◯ 열심당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되자 이에 항거한 유대인 무리이다. AD 6년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가 면직되고 로마가 유대 땅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에게 호적등록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세금 징수를 위한 조치였다.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운동에 참여하게 된 무리가 열심당이다. 원래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으나 바리새파의 수동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바리새파를 떠났다. 이들은 이방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며 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십계명의 첫 계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무력으로라도 이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

3. 사회

로마의 사회 구조는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 기사 계급, 일반 시민,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노예 등으로 구분되어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신약시대 로마 제국에서 시민권은 시민권을 가진 부모에게서 출생하거나 노예에서 시민으로 해방되거나 군 복무나 특별 칙령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노예가 있었다. 로마 경제는 노예 제도에 크게 의존했다. 노예는 전쟁에서 사로잡히거나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거나 노예 집안에서 태어남으로 배출되었다. 특정인종이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삶도 상당히 다양했다. 광업, 농업에 쓰이는 노예가 있는가 하면 가사 노예는 요리, 미용, 종, 첩의 역할을 했다. 특별히 훈련받은 노예들은 중요한 직위에 오를 수도 있었고 소유주를 위해 사업을 경영할 수도 있었다.

로마가 이룩한 중요한 업적은 법률에 있었다. 헬레니즘의 민주 정신을 계승한 로마는 법률을 통해 제도화했다. 로마의 법률은 모든 공법과 사법의 효시인 12동판법(BC 449)에서 시작하여 민사소송법, 명예법, 황제의 칙령을 포함하는 사법(私法)과 형법 등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황제의 칙령은 국법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법률들은 훗날 유스티니아누스(483-565)에 의해 12권의 법전과 50권의 요람 그리고 4권의 법학 개요로 정리된다. 로마 당국은 법과 질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지역 안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지역 안에서 해결하도록 각 총독과 행정장관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자신이 요청할 경우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혈통이 중시되었다. 빈번한 외세 침입으로 유대인의 혈통 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만일 양친 가계가 4대에 걸쳐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유대 사회 안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보장이 가능했다. 이러한 혈통과 종교적 성향에 의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에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정치적 독립을 위해 결성된 열심당의 활동은 로마 당국을 괴롭히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경제

정치 권력을 잡고 있는 로마 본토가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 반면, 대다수의 식민지 주민들은 빈곤 속에 허덕여야 했다. 로마에서는 밀, 포도, 올리브 등을 주요 작물로 하는 농업 경제를 주축으로 노예를 통한 광업, 제조업이 고루 발전했다.

그러나 본국의 산업보다는 잘 정비된 도로와 해상수단을 통해 신속히 운반되는 식민지로부터의 생산물이 로마 경제를 풍요롭게 했다. 또한 근동 여러 나라와의 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주로 아마포, 산호, 유리, 금속제품 등을 수출하고 향료, 보석, 상아, 비단 등을 수입했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전통적 농업 중심의 산업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기술의 낙후와 노예 인력 과잉공급 현상이 나타나 전반적인 임금의 하락과 생활의 빈곤을 가져왔다. 더욱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랍비와 제사장들이 상당 부분의 농토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빈곤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5. 문화

알렉산더 치하에 꽃피게 된 헬레니즘은 로마인의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헬라 문화권에 살던 유대인이 모국어를 잊어버릴 만큼 헬라어는 이미 무역과 국제 교류의 통용어로 정착되어 있었고 로마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다.

헬라인들의 습성을 따라 로마인들도 공중목욕탕을 지어 목욕을 즐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물이 귀할 뿐 아니라 옷 벗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대다수는 목욕 시설을 외면했다. 로마인들은 경기장을 지어 노예를 이용한 투기와 전차 경기를 즐겼다. 특히 황제를 위한 운동 경기가 5년마다 개최되었다. 헤롯도 예루살렘에 경기장과 체육관을 건설했는데,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체로 당시의 문화나 생활양식은 일부 특권층 위주로 진행되었고 쾌락을 위한 인권의 말살이 자연스럽게 저질러졌다.

6. 교육

로마는 정치적으로 세계를 정복했지만 문화적 영역만은 헬레니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문화, 사상, 교육 등 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 헬라의 양식을 거의 답습하고있었다. 로마인들은 7-12세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시와 격언의 암기가 주요한 교육의 내용이었고 출세의 수단으로 웅변을 중시했다. 한편 각 가정에서는 ‘파이다고고스’라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를 두어 자녀의 생활을 시중들게 했다(갈 3:24,25에서 ‘초등교사’ 또는 ‘몽학선생’으로 번역되었다). 이 과정을 마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려면 중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여자의 경우에 이 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한편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가정이 교육의 중요한 장소였으며, 회당에 딸린 학교에서는 토라(율법)를 교재로 한 암기식 교육을 진행했다.

상급학교에서는 유대 교훈의 대전집인 학카다와 할라카를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방식은 유대인의 결속과 율법 준수 등에 크게 기여했다.